김해서화의맥을찾아7] '국보급 전각가'로 불린 청사 안광석수암과 청사의 예술세계 (하) 차ㆍ서예ㆍ전각ㆍ와당그림ㆍ골동 등 독보적 면모 보여 작품들 국립현대미술관ㆍ연세대박물관 등에 소장
2009-08-13 박여진 기자
와당병풍안광석 선생은 한국전통의 기와문양을 이용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청사 안광석. 사람들은 그를 ‘국보급 전각가’라 불렀다.
청사 안광석 선생(1917~2004)은 김해시 진례면 시례 생으로 수암 안병목 육천 안붕언 선생과는 광주 안씨 시례 문중의 일족이 된다.
어린시절부터 글쓰고 새기는 것을 좋아해 잠시라도 시간이 나거나 무료할 때는 글을 쓰고 칼로 파내고 새기는 일을 놀이삼아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성년이 된 선생은 인생의 번뇌와 고통, 무상함의 근본 해결책을 찾아 출가를 결심해 26세 되던해에 범어사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다.
산사에서 수행생활을 하면서도 틈이 날때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나무나 돌에 새기는 버릇은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러던 어느날 은사이신 동산스님께서 선생의 작품을 보시고는 타고난 재주가 있음을 알아보고 위창 오세창 선생께로 보내 본격적인 공부를 하게 했다고 한다.
한국 서화사를 논할때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문헌인 ‘근역서화징’을 집필한 위창 선생은 동산스님의 외삼촌이 된다.
타고난 성품과 집안의 영향으로 글쓰기와 새기기를 놀이삼아 했던 선생은 성년이 돼 출가를 해서는 이미 정해진 길을 가듯 본격적으로 글씨와 그림, 그리고 전각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서울에서 약 7년간 머물며 오세창 선생의 지도하에 전각, 서예, 와당 그림 공부를 하다가 다시 범어사로 내려와서는 부산 사범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는데 이후 선생은 또다른 인연으로 환속을 결심하게 된다.
머리를 다시 길렀지만 자신은 항상 불제자이며 특히 원효, 의상의 제자임의 강조하면서 두 스님의 사상을 작품화 하는 것을 평생의 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청사(晴斯)라는 아호는 ‘갠날에도 도롱이를 쓴 사람’이란 뜻으로 맑은 날에도 비온날처럼 칩거해 시정잡사를 멀리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선생 자신뿐 아니라 문하생들을 그 어떤 공모전에도 참가시키지 않았다. 이름알리기에 급급한 세태와는 동떨어진 부분이다.
이 부분을 눈여겨 살펴보면 선생의 타고난 성정일 뿐만아니라 시례 안문의 전통과 함께 더 거슬로 올라가면 아석, 서강, 남명 선생 등이 그러했듯 내세우길 싫어하고 행동으로 말하는 김해인의 본 기질이 아닌가 싶다.
눈을 뜨면 한잔의 차로 일과를 시작하고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리만큼 부지런했던 선생은 차, 서예, 전각, 와당그림, 갑골, 불교학, 한학, 골동 등 많은 분야에서 독보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특히 선생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작품으로 증명한 분이라 하겠다.
타고난 성품과 집안의 인연으로 어린시절부터 아석, 수암 선생 등의 글씨와 그림 전각작품들과 함께 일족들이 소장한 서화를 통해 예술에의 눈을 뜬 이후, 동산스님의 인연으로 위창 오세창 선생의 예술세계를 전수받아 자신의 모든것을 바쳐 남긴 청사 안광석 선생의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 연세대박물관 등 유명미술관과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데 세상사람들은 그를 ‘국보급 전각가’라 불렀다. <박여진 기자>
'---그림&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명반석(明礬石), 땅 끝 마을의 돌 (0) | 2019.07.20 |
---|---|
[스크랩] 시골의 옛날 풍경 (0) | 2011.12.01 |
[스크랩] 토지매매계약서 등 각종 서식 모음 (0) | 2011.01.06 |
[스크랩] Khin Maung Zaw 스님의 그림세계 : 음악 - 히말라야 (0) | 2011.01.02 |
[스크랩] 낙관(落款)은 도장이 아니다 (0) | 2007.12.25 |